지난번 글이 원래 의도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뜨거워졌습니다. 이 참에 스팀에 대한 문제점을 토큰 이코노미 관점에서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토큰 제조 비용이 경쟁적으로 증가하지 않는다
많은 분들이 개인의 자유와 시장논리를 주장하시는데, 사실 시장은 정말 합리적이고 치열한 공간입니다. 경쟁이 항상 존재하고 경쟁에서 지면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인거죠. 하지만 시장원리가 잘 작동해야만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토큰 이코노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경쟁이 존재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계속 더 많은 비용을 투자해야하는 토큰 이코노미가 잘 설계된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가장 잘 반영한 예는 비트코인과 같은 PoW입니다. 채굴자들은 서로 경쟁을 하고, 채굴기 제조회사들은 점점 더 효율적인 기술을 개발합니다. 그 결과 비트코인 난이도는 장기적으로 꾸준히 올라가고 있습니다. (물론 최근과 같이 가끔씩 있는 폭락장에서는 일시적으로 하락하기도 하지만요) 이렇게 점점 많은 비용이 투입되어 주조된 토큰은 "밑지고 팔지 않는" 시장의 기본 작동원리 때문에 가격이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스팀은 이런 경쟁구조가 시스템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로 호혜적인(소위 막 퍼주는) 토큰 이코노미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쟁구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코드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스팀에서는 사람을 통해 경쟁을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요, 여기에 대한 표현이 바로 "Proof of Brain"입니다. 즉, 이 개념의 핵심은 단순히 마음 가는대로 보팅하라는 뜻이 아니라 더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토큰이 만들어지도록 경쟁을 유도하라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매번 컨테스트의 심사위원이 되어 최우수상, 우수상을 뽑는 것이죠. 물론 참가상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최우수상보다는 상품이 적어야 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 구조는 사실 굉장히 취약합니다. KR 커뮤니티나 스팀 전체 커뮤니티의 흐름을 봐오신 분들은 금방 이해가 되실 것 같은데요, bitbot이나 담합보팅 등을 보면 그 내부자 입장에서도, 외부자 입장에서도 추가적인 자원을 들일 동기가 없습니다. 내부자 입장에서는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기존에 있는 자본만을 가지고 보상을 받으면 되고, 외부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보상을 못 받으니 딱히 노력을 들이지 않게 되거나 플랫폼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스팀의 Proof of Brain 실험은 실패쪽으로 많이 기울었다고 생각합니다.
2. 하나의 토큰에 여러 주조과정이 혼재되어 있다
보상 얘기가 나오면 종종 이슈가 되는 것이 저자 보상과 큐레이션 보상의 비율입니다. 75:25냐 50:50이냐 아니면 그 중간쯤이냐 하는 논란은 명쾌한 해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저자 보상과 큐레이션 보상의 생성과정이 다르지만 보상은 스팀 하나로 받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기에 증인보상과 스팀파워 보상 두 가지가 더해져서 스팀 토큰은 총 4가지의 주조과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 네 과정 중 단 하나에서라도 허점이 생기면 전체 토큰의 가치가 유출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토큰 이코노미를 얘기하면서 제가 자주 강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은 매우 합리적이기 때문에 최저 비용으로 토큰을 주조하는 쪽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최저 비용이 낮아질수록 토큰 가치도 함께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이 들어가 있는 사례로 예전에 증인 보상에 대해 논란이 있던 적이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호의호식 한다는거죠. (지금은 오히려 손해를 보면서 노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얘기가 잘 안나오더라고요) 만약 이게 사실이라서 저같은 증인이 거의 공짜로 증인 보상을 받아간다면 저는 스팀 가격이 얼마이건 팔아치울 동기가 충분합니다. 스팀 1개당 생산 단가가 1원이라면 1원이 될 때까지 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경우 영향을 받는 것은 저자, 큐레이터, 스팀파워 보유자 모두입니다. 저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보상을 받든, 큐레이터가 얼마나 열심히 글을 읽고 파워를 모아서 보팅을 하든 말이죠. 결과적으로 증인이 저비용으로 보상을 받기 시작하면 저자와 큐레이터들도 저비용을 들이는 사람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가상의 예시이며 증인으로 생산하는 토큰 단가는 1원보다 훨씬 높습니다 ^^;)
3. 핵심 철학이 취약하다
경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철학이 나와 당황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토큰 이코노미뿐 아니라 실물경제를 포함한 모든 사회구조는 핵심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기업도 물론 중심되는 철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핵심 철학은 내부를 모으는 응집력이 됨과 동시에 외부와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도 합니다. 핵심 철학이 없는, 혹은 무너진 사회나 기업은 오래 존속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토큰 이코노미에서 토큰은 특정한 사상이나 생각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의 자발적인 가치 척도이기 때문에 핵심 철학과 그에 대한 강한 공감대 형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모든 화폐가 그렇듯이 토큰도 믿음(혹은 팬덤)을 잃어버리면 그 순간 가치도 함께 잃기 됩니다. 참고로 핵심 철학의 위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도기코인입니다. (Much Fun! Very Wow!)
스팀도 이런 철학이 강력했던 시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핵심 철학은 사라지면서 점점 여러 생각들이 혼재되며 공감대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물론 많은 코인들에서도 발생합니다. 비트코인도 비트코인 캐시랑 갈등이 있었고, 이더리움도 이더리움 클래식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들과 현재 스팀이 다른 점은,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은 혼재된 생각들이 갈라져서 순도가 높은 각각의 체인으로 빠져나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스팀잇측에서 초반에 더 적극적으로 나왔어야 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팬들을 보다 많이 모으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비즈니스들을 접붙이는 형식으로 이어왔다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리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좋은 흐름을 놓쳤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해결의 실마리는...
이런 복합적인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존재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혼재된 생각들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소위 컨텐츠 대 자본 논쟁을 계속하기보다는 컨텐츠를 중시하는 쪽과 자본을 중시하는 쪽을 나누고 각각 알아서 발전하게 놔두는 것이 가장 현명한 해결방안일 것입니다. 그리고 공유된 철학을 토대로 커뮤니티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관리한다는 것은 공유하고 있는 원칙과 가치를 지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쪽이 더 현명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결국 시장이 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