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토큰 이코노미에 대한 관점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 발단은 감사하게도 여기에서 추천받은 로스버드의 책 "정부는 우리 화폐에 무슨 일을 해왔는가" 입니다. 꽤나 어려운 책이지만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책의 내용 중 화폐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보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부에서 화폐 주조에 개입하면서 어떠한 부작용들이 발생했는지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악화(bad money)와 양화(good money)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쁜 돈이란 마모되거나 불순물이 많이 섞이는 등의 이유로 실제 금이나 은의 무게가 적은 주화를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마모된 동전은 많지만 나쁜 돈 좋은 돈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쓰는 것과는 사뭇 차이가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개념은 블록체인과 토큰 이코노미에 큰 시사점을 줍니다.
사실 블록체인에서도 토큰은 모두 동일하게 취급됩니다. 하지만 그 제조과정에서 들어가는 재료의 양과 질은 시시각각 달라집니다. 결국 나쁜 재료가 지속적으로 들어가면 토큰의 가격은 전체적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비트코인의 예를 들자면, 비트코인이라는 토큰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는 전기, 채굴기 감가상각, 운영 노력입니다. 어떻게 보면 법정화폐를 간접적으로 쏟아붓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건이 발생해서 비트코인을 주조(채굴)하는데 드는 비용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비트코인 토큰의 가격은 낮아질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아니면 경쟁이 두 배로 늘어서 현상태를 유지하게 되든지요. 하지만 비트코인은 이런 일이 잘 발생하지 않고, 상당히 안정적으로 주조를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경쟁이 심화되어 비용이 올라가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조금 가까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바로 스팀입니다. 스팀은 주화 생산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증인이 되어 스팀을 만든다면 노드 서버비용, 운영비가 소모됩니다. 저자 입장에서는 글을 쓰는 노력이 투입됩니다. 여기에서 자본이 없어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큐레이터는 자본과 좋은 글을 찾는 노력을 투입합니다. 큐레이터는 자본이 많을 수록 수익을 더 많이 얻을 수 있기에 자본이 개입됩니다. 스팀파워 보유자는 자본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스팀을 하면서 느끼는 대부분의 문제는 위에서 언급된 투입과 산출되는 토큰 보상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노력을 많이 한 글은 보상을 거의 못 받고,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글이 자본의 힘을 업고 더 많은 보상을 만들어낼 때, 스팀에 투입되는 무형적 가치는 점차 낮아질 것입니다. 대신 자본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에는 PoS 코인과 매우 유사한,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글을 쓰는 것이 의미가 없는 블록체인 SNS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전에 내로라했던 PoS 코인들이 지금 대부분 몰락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는 큰 위기일 수 있습니다.
큐레이션션에서도 좋은 글을 찾는 노력이 빠지고 자본만 개입된 경우가 문제가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는 보팅봇입니다. 이 역시 자본지향적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자본이 주도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그렇듯이 자본만으로는 아무런 가치를 생산할 수 없습니다. 자본은 노동력이나 에너지 등 다른 무언가와 결합할 때 비로소 편익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경제학의 기본인 Cobb-Douglas 모델을 알고 있는 분이라면 L이 0이 된다면 Y도 항상 0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돈을 100억 이상씩 가지고 있으면서 연간 이자를 10%씩 받지만 아무도 일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모두가 행복할지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스팀 토큰에 유무형의 비용이 매우 적게 들어가게 되면 스팀 가격은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레샴의 법칙 "악화(나쁜 돈)가 양화(좋은 돈)를 몰아낸다"는 말처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좋은 토큰을 만들던 사람들도 점차 떠나가게 됩니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는 추후에 따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서는 비트코인과 스팀만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코인과 토큰 이코노미에도 이 기본적인 법칙은 항상 적용됩니다. 토큰을 만들 때 법정화폐를 투입하든(스테이블코인), 자본을 투입하든(PoS), 특정 서비스를 투입하든(DPoS, 마스터노드), 상품을 투입하든(예: LINK) 투입되는 원료가 가치가 있어야 하며, 가능하면 점점 더 많은 가치가 투입되도록 하는 것이 토큰 이코노미 설계의 핵심 과제입니다. 여기에 방점이 찍히지 않은 토큰 이코노미 설계는 점점 쇠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토큰 이코노미를 "위변조가 불가능한 디지털 플랫폼에 기반한 화폐 주조와 순환 시스템"라 생각합니다. 아직 완벽하게 다듬어진 정의는 아니지만 화폐 주조가 공공에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 민간도 포함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발행이라는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강한 표현보다는 실질적인 원료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조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계속 생각을 넓혀나가면서 공유하고 토론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