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꿈이 뭐니?] 다른 누가 아닌 내가 되어 나의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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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전에 @anysia님에게 지명을 받았는데, 대충 쓰고 싶지 않아서 미뤄두다가 이제서야 제 스케쥴과 마음이 진정이 되어서 차분하게 모니터 앞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립니다. 기회를 주신 @anysia님, @mmerlin님과 @flightsimulator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저의 내면 세계를 탐험하기에 앞서, 갑자기 바뀌는 독백체와 길고긴 스크롤에 놀라지 않도록 마음에 안전띠를 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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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mmerlin), 하늘(@flightsimulator)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프로젝트

자신의 꿈에 대해 얘기한다.
지금은 어디까지 왔는지 얘기한다.
3명의 스티미언을 지정한다.
태그는 #flightsimulation





꿈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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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서는 꿈을 이렇게 풀이한다. 이 [꿈 릴레이]에서 말하는 꿈은 첫번째 풀이는 아닐 것이다.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또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적인 소망이리라.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꿈이란 말을 들었을 때, 아이들은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을, 어른들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적인 소망'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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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의 이야기를 적어보자. 우리가 지인의 가게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만 19살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교토로 왔는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저 모두가 가기 때문에 들어간 대학에서 의미 없는 4년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대학 밖에서 인생을 배우고 싶기 때문에 세계일주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전에 히치하이킹으로 교토에 왔는데 너무 좋았어서 무작정 짐을 싸서 왔다"고 했다. "지금부터 살 곳을 구할 것"이라고 했다. 지인이 그녀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세계일주를 하면서 마음에 든 곳에 게스트하우스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마침 지인은 3층짜리 학생용 아파트라는 장소가 있었고, 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식모살이를 한 경험이 있었다. 키키의 꿈을 들은 지인이 둘이 같이 살면서 에어비앤비를 해보라고 했고, 당시 지인의 가게 2층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던 나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다음 날 키키와 함께 이사를 했다.

키키는 현실을 볼 줄 몰랐다.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돈에 대한 거부감 마저 있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청소나 좀 도와주려던 내가 호스트가 되었다. 나는 키키의 꿈에 의해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된 것이다. 어쨌든 그로인해 2달로 잡았던 운영기간이 1년으로 늘어났고, 키키는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올해 더 큰 한 걸음을 내딛었다. 정말로 세계일주를 위해 교토를 떠난 것이다.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의 이곳저곳을 거쳐 지금은 호주에 있다. 자주 연락을 주고 받는데, 얼마전에 전화를 해서 하는 말이... "온니(언니만 한국어)! 나 이제 여행자금이 얼마 안남았어... 그래서 블로그로 돈 벌거야!!!" 란다. '블로그로 돈을 벌겠다' 는 부분은 문제라고 할 수 없는데, '여행자금이 얼마 안남아서' 가 문제였다. "블로그를 몇 달 또는 1년 이상 꾸준히 하다보면 수익이 생길 수도 있지만, 수익을 위해 블로그를 하기엔 너의 상황에 걸맞지 않은 수단" 이라는 말과 함께, 그나마 희망적인 플랫폼으로써 스팀잇을 알려주었다.

며칠 전에 그녀가 전화를 해서 "온니.. 온니처럼 컴퓨터로 일을 하고 싶은데.. HTML 공부 너무 어렵다... 나는 잘하는 게 뭘까? 뭐가 되고 싶은 걸까?" 라며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키키와 꿈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때 키키에게 "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 잘 하는 것과 즐거운 것은 다르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 속하니?" 라는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키키가 "응... 온니가 예전에 그런 말을 했었지. 근데 잘 모르겠어. 그걸 알 수 있을 때까지 무리를 해서라도 계속 해야하는 걸까?" 라고 되묻기에, "그렇게 잘 모를 때에는, '보기' 를 많이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 도서관에 가거나 인터넷에서 관심이 가는 것들을 전부 골라 펼쳐 놓고 쭉 훑어보는 건 어때?" 라고 말했다.

이 방법은 내가 선택을 하지 못할 때 쓰는 방법이다. 나는 선택을 잘 하는 편이 아니다. 나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쇼핑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우선 전체를 훑어보며 관심이 가는 것들을 빠르게 체크하고, 그 관심에 순위를 매기며 선택지를 줄여나간다. 그리고 포기하기 힘든 선택지들을 자세히 파고 든다. '무엇이 나에게 더 맞는지', '왜 이것이어야하는지' 를 생각하며 최종 결정을 한다. 그러면 그 결정에 대한 후회가 없거나 그나마 적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는, 갓 둥지에서 나와 뽀송뽀송했다. 꿈을 말할 때 일말의 걱정이나 의심이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정말 할 수 있을까..? 정말 될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꿈에 대한 고민이 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 꿈'이, 커갈수록 현실의 벽에 자주 부딪치게 되면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적인 소망 = 꿈' 으로 바뀌고, 그래서 자신의 꿈이 뭔지 잘 모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미 꿈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어른에서 아이가 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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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1. 내 꿈은 집을 나오는 것이었다.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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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일찍 들었던 것 같다. 동정을 받으려고 쓰는 글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배경을 나열하는 것이므로 동정을 하실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시길.

나에겐 40살 차이가 나는 부모님과 10살 차이가 나는 언니가 있고, 오빠가 둘 있으며,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였다. 아버지는 사업의 실패를 술로 달래셨고 술은 아버지를 폭력적으로 만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하느라 늘 여유가 없었고 언니와 오빠들도 어린 나이에 우유 배달과 신문 배달을 해야 했다. 늘 물려받은 것을 입고 썼다. 오랫동안 주식(主食)은 밀가루였고 특히 수제비를 많이 먹었다. 정수기가 없어서 늘 끓인 보리차나 오가피물을 마셨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그나마 빌라에서 살았는데, 아버지의 기사회생을 위한 노력은 오히려 빚만 늘렸고 사는 집은 점점 작아졌다. 내가 중고등학생 때 살던 집은 무려 연탄을 땠고, 심지어 화장실이 푸세식(재래식) 이었다. 볼일을 보다가 밑을 보면 늘 하얀 구더기들이 꿈틀거렸고 발을 헛디뎌 그 안에 빠질까봐 늘 조마조마 했다. 주기적으로 트럭이 와서 두꺼운 호스를 그 안에 넣고 커다란 모터소리를 내며 꿀럭꿀럭하고 빨아들였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서 커다란 양동이에 끓인 물을 찬물과 섞어서 씻었다. 2010년 서울에서의 삶이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자랐고, 아직도 서울에서 살지만, 내게 있어 서울의 삶은 시골에서의 삶과 그닥 다르지 않다.

중학교 3학년 때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생겼다. 그래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부풀어올라서 마구마구 달리고 싶어졌다. (아직도 그 때를 떠올리면 그 기분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깜깜한 밤에 가파른 오르막길을 단숨에 달려서 집에 도착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가고 싶던 고등학교에는 기숙사가 있었다. 다른 그 무엇보다 기숙사가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집에서 나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푸세식 화장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가출은 생각할 수 없었다. 오빠들이 가출을 하면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고 속상해하는지, 그리고 오빠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얼마나 혼나는지를 두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그 고등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가출처럼 보이지 않는 가출이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가고 싶던 고등학교에 합격을 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양변기를 썼으며 난방은 뜨거울 정도였고 냉방은 추울 정도였다. 아침, 점심, 저녁이 모두 다른 반찬이었고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었으며 매일 식단이 달랐다! 급식이 맛없다는 불평을 하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평소에 먹던 밥에 비하면 훨씬 맛있었다. 더군다나 저녁에는 간식까지 줬다. 주로 빵과 우유였는데, 예산을 급하게 처리해야했는지, 한명당 마시는 요구르트 1리터가 자주 배급 되었고 마시는 요구르트 1리터 + 김연아선수가 올라간 홀케이크가 배급 되는 날도 있었다.

나는 기숙사에 들어가서 가능한 나오지 않았고 인터넷으로 일을 받아 돈을 벌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했던 일은 포토샵으로 인터넷 쇼핑몰에 올라갈 상품의 상세페이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핸드폰비와 재료비, 식비 등을 해결했고 일본어 학원을 다녔다. 일본 유학을 꿈 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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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2. 내 꿈은 한국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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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벗어나고 싶었다. 가정환경은 내게 계속해서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가족 구성원 중 아무도 그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가족들은 참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다. 환경이 그들의 가슴 속에 사랑을 담을 여유를 앗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 환경은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다들 가난에 잘 적응하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적응만 한 것이 문제지만)
가족만 생각하면 늘 안타깝고 부끄럽고 자존감도 낮아졌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훌륭한 가족이었네...

뭐... 암튼 그래서 새로운 환경에서 나 자신을 키우고 싶었다. 절대적으로 가정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곳, 외국이었다. 미국은 너무 돈이 많이 들고, 중국은 치안이 걱정되는 반면, 일본은 가깝고 친숙했다. 일본 중에서도 교토(京都)였다. 도쿄(東京)는 돈이 많이 들고, 존경하는 선배가 다닌 교토에 있는 대학이 당시 유학생의 경우 학비를 30% 감면해 주고 장학금 지원도 많았다. 무엇보다 교토는 내게 가장 일본스러운 곳이었다.

집에서는 물론 반대가 심했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유학을 하냐. 가서 국제미아 되는 거 아니냐 등등... 그래서 미친듯이 돈을 벌었다. 기능경기대회는 메달과 명예보다 상금을 위해 열심히 했다. 일본어 공부, 아르바이트와 대회 연습으로 밥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 앉아있었더니, 허리디스크와 대상포진에 걸려서 장기통원하고 신종플루 후보로 격리도 되고 그랬다. 신종플루 때문에 코에 길다란 막대기를 넣고 빼는 걸 3번이나 당했다. 진짜 끔-찍... 대상포진에 걸렸을 때가 은근 웃겼다. 허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파서 침을 맞으러 갔는데 한의사님이 피부과에 가보라고 하시더라. 피부과에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피와 신경을 갉아먹는 바이러스다. 이미 회복기에 접어들었다. 어른들도 아파서 쉬는 병인데 어떻게 참았냐" 라고 하시더라. 어떻게 참았긴... 허리디스크가 심해졌나보다 하고 무식하게 참았다. ㅎㅎ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었는데 집이 이사를 가야하는 상황이 생기면서 모아뒀던 500만원이 단숨에 사라졌다. 가고 싶던 일본 대학에 합격은 했지만 입학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너무 속상하고 원망스러워서 엉엉 울었다. 눈물을 닦고 더욱 더 한국을 벗어나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매우 독해졌다. 맞다, 나는 이기적이다. 작은 오빠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혼자만 살겠다"는 게 맞다. 누구라도 한명은 잘 되서 끌어올려줘야 할 것 아닌가.

일본 유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차선책으로, 합격한 대학에 있는 일본어학교에 입학했다. 학비가 쌌고, 상담 결과, 대학 합격이 1년간 유지된다고 해서이다. 거액의 잔고증명서가 필요하다기에 또 한번 좌절했는데, 인터넷으로 방법을 찾아보니 수수료를 지불하면 잔고증명서 발급용으로 돈을 빌려주는 회사가 있기에 해결했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비지니스가 있다. ^^;

그렇게 겨우겨우 일본 땅을 밟았다.
매일매일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대학을 가기 위해 모은 돈으로 일본어학교에서 돈을 벌지 않고도 반년간 공부만 할 수 있었다. 공부만 할 수 있다는 게 정말이지,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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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3. 내 꿈은 유럽에서 살아보는 것이었다.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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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입학했다. 한국 유학생들보다는 일본 현지 친구들과 더 어울려 다니려고 했으므로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 뭐, 일본어 학교에 있을 때부터 노는 것보다 공부해서 장학금 받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이미 재수없다고 평판이 좋지 않았다 ^^;; 굳이 벌어진 사이를 노력해서 매울 이유도 여유도 내겐 없었다. (헉... 재수없어)

그들이 나에 대해 잘 몰라도, 내가 본 그들은 각각 장점이 있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유학 초기에 같이 살았던 동갑 여자애가 가족과 친구들을 정말 잘 챙기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자주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고 오가는 대화는 따뜻했다. 나는 당시 가능한 가족과 거리를 두려고 했기 때문에 그 아이의 그런 모습이 정말 부럽고 좋았다.

하루는 집에서 밥을 먹는데 그 아이가 그 아이의 친구와 함께 들어와서 내가 그 아이와 다른 또래들을 무시하고 깔봤다고 오해를 하며 뭐라뭐라 말했다. 만약 그 오해가 풀리지 않았다면 그 아이들은 아마 날 싫어할거다. 딱히 그 오해를 풀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신경쓰지마. 그것도 저것도 이것도 신경쓰지마” 라고 했고 그 아이와 함께 들어온 아이는 “너 같은 년은 처음 본다 씨발년아”라며 문을 쾅 닫았다. 대학에 가서도 한달간 인사가 씹혔고 나도 더이상 인사하지 않았다. 재밌고 괜찮은 아이들이었는데... 그 아이들에게 난 씨발년이었던 것 같다. 험담하려고 적은 게 아니라 그냥 생각나서 적어봤다.

대학에 입학하고 장학금으로는 부족한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고 싶었다. 요식업이 딱이었다. 홀서빙을 하면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기를 수 있다.

그래도 학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1학년이 끝나가는 11월에 빈 교실의 책상들을 어루만지며 '여기까진가...' 하고 훌쩍거렸다. 세계를 무대로 하고 싶었다. TONIK이라는 네덜란드의 디자인 스튜디오를 좋아했다. 그래서 유럽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삶은 참 아이러니하다. 몇일 뒤 엘리베이터 앞에서 부학과장님이 내게 물었다. "스웨덴에 갈 생각 있니?" 라고. 너무 뜬금없어서 "물론 생각은 있죠! 하지만 저는 돈도 없고 영어도 못하는 걸요." 라고 답했다. 집에 왔는데... 갑자기 머리가 띵 해졌다.

"돈이 없으면 만들면 되고 영어가 안 되면 공부하면 되잖아?"

다음 날 부학과장님을 찾아가서 말했다.
보내달라고. 가겠다고. 가고 싶다고.

그 후, 2학년 1학기 수강 신청에서 대학의 모든 영어 수업들을 신청했다. 재수강부터 상급영어까지, 선생님들을 찾아가서 "학교에서 스웨덴에 가라는데 나는 영어를 못하니까 배워야겠다." 고 설득하고 모든 영어시간에 들어갔다.

돈을 만들기 위해 자취를 그만두고 게스트하우스에 살면서 일했다. 당시 살았던 방을 찍은 사진이 어딘가에 있을텐데.. (뒤적뒤적) 앗, 찾았다. 이렇게 사방이 창문이라 매우 춥고 이불을 깔면 방이 가득 차는 조그마한 곳에서 살았다.

이곳의 여주인님이 나의 자존감을 확 낮춰주셨다. 10시 이후에 들어오면 샤워도 못하게 했으며, 샤워 하는데에 30분 이상 걸리면 뭐 하느라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샤워 후에 꼭 스폰지로 욕실 청소 하도록 시켜놓고;;) 이 닦다가 화장실이 급해서 볼일을 보며 양치질을 하면 상식이 없다는 말을 들었고, 학교 가기 전에 밥 먹는 것도 힘들었다. (아침에 전자렌지 쓸 때는 반드시 시간 보면서 기다렸다가 띵-하고 소리가 나기 전에 문을 열어야 했다)


당시 그린 그림

"바보 아니야?" "상식이 없어." "도대체 무슨 생각하는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라는 말들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으며 나는 발소리도 내서는 안 됐고,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없애야 했다.
결국 자존감이 바닥이 나고 너덜너덜해져서 3달만에 그만두었다. 갈 데가 없어져서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5月27日から8月15日までの約2ヶ月間「一緒に住んでもいいよー!」って方
いらっしゃいませんかー!o(><)o"

"5월 27일부터 8월 15일까지 약 2개월간 함께 살아도 좋다는 분 안 계십니까~!"

다행히 대대로 보이스카우트를 하는 가족이 주워주셔서 스웨덴에 가기까지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다. 그 분들 덕분에 너덜너덜했던 마음과 자존감이 회복되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이 집의 할머니와 외동딸과 내가 생일과 혈액형이 같아서 함께 축하했다.

그런데 또 문제가 터졌다.
학교에서 이대로 보내는 게 걱정이 된다고 50만엔의 잔고 증명을 요구한 것.... 아니나 다를까 집에 전화했더니 이미 나를 도와주느라 집세도 못내고 있었다. 또 눈물이 났다. 비행기표도 샀는데 이대로 포기하는 건 정말 싫었다. 한바탕 시원하게 울고 돈 많은 지인을 찾아가서 고개를 숙였다. 자존감은 없으면 곤란하지만 자존심은 버려야 할 때가 있다. 그 지인은 많이 배우고 오라며 선뜻 50만엔을 빌려주었고 은행보다 더 믿을 수 있다는 말을 하셨다. 그렇게 모든 게 해결 되는 듯 했다...

...해결 되는 듯 했지만, 갑자기 학교에서 장학금을 줄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당시 유학생과에서 제법 높은 지위를 갖고 계신 분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장학금 지급 대상이 된 유학생은 대학에 '재학'중이어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데, 장학금 지급 대상이 된 유학생이 또 유학을 간 "전례가 없어서" 라고 했다. 아니, "아트와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꾼다" 는 슬로건을 걸고 있는 학교에서 "전례가 없어서" 안 된다니? 애초에 교류가 없던 학교에 교환협정을 맺도록 보내는 '전례가 없는 일'을 시키면서 '전례가 없어서 장학금을 줄 수 없다'니? 그리고 내가 받은 서류에 분명 '대학 대표'라는 말이 써 있는데 몸이 일본에 없으면 '재학'이 아니라는 것인가? 너무나도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 학과 116명 중에서 2위, 코스 42-3명? 중에서 1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랑은 아니고 인증...(긁적)

그래서 이사장실을 찾아갔고 비서님에게 면담 날짜를 받았다. 그런데 이사장님을 알현하기 전에 회의가 열렸고 아쉽게도(?) 이사장님을 알현하지 못한 채 일이 해결되었다. 나는 장학금을 받고 스웨덴행 비행기를 탔다. "전례가 없어서 안 된다"는 말을 한 분은 그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스웨덴에서의 생활은 정말 꿈만 같았다! 학생 기숙사에서는 전부 이케아 제품을 썼고 당연하다는 듯 오븐이 있었다. 공용키친이 있어서 학생끼리 교류를 할 수 있었고, 세탁실에 들어가는 방법도 특이했으며, 슈퍼마켓도 신기했다.

20120827 메모 내용

기숙사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샴푸, 휴지 등을 사기위해 근처 마트로 갔다. 사진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유제품들과 스낵, 빵과 씨리얼들.. 장바구니는 손에 들수도, 끌고 다닐수도 있게 만들어져있다. 마트에서 계산할 때 가장 주의할 점은, 동전이 나오는 기계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기계앞에서 계산해야 동전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 나는 그걸 모르고 기계를 지나쳤다가 내 뒷사람이 나의 1SEK를 가져가서 마트 직원한테 따로 받아야했다.
참고로 우유 종류가 정말 많은데, 내가 담은 우유는 걸쭉하고 뭔가 시큼한 냄새가 나는 종류였다... 사자마자 상한 줄 알았다.

수업은 스웨덴어로 진행되었지만 수업이 끝나면 교수님과 학우들이 영어로 알려주었다. 학교는 24시간 이용 가능했으며 각 학과마다 스튜디오가 있고 각 스튜디오에는 주방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는 커피와 다과들이 함께 했다. 컵을 가져오면 교수님이 커피를 따라준다.

그렇게 스웨덴에서 약 반년을 살았다. 지인이 빌려준 돈 덕분에 핀란드의 헬싱키도 가보고, 에스토니아의 탈린도 가보고, 독일의 베를린에서 1주일, 뮌헨에서 2주일을 지낼 수 있었다. 스웨덴에서 겪은 안좋은 일이 스웨덴의 기억을 흐리게 만들었는데, 이렇게 적어보니 이글에 다 올리지 못할 좋은 추억이 참 많았다. 이래서 여행기를 쓰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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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4. 내 꿈은 아트와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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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로서든, 일러스트레이터로서든, 애니메이터로서든, 아티스트로서든,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따라서 내가 없어도 디자인이 충분한 회사가 아니라 디자인이 필요한회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졸업 후 뜬금없이 치과재료와 모형을 만드는 메이커에 취직을 했다. 대학 3학년 초에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어느 해프닝이 있었는데,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을 눈여겨 보신 회장님이 몇가지 질문을 하셨고, 스웨덴에서 시간이 많아서 그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이야기했더니, 명함을 주시며 우리 회사에 오라고 하셨다. 홈페이지와 평판을 조사해보니 괜찮은 회사였다. 반년간 고민 했는데,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취직했다.

연수 기간 동안 시골에 있는 공장에서 일해보고 급여랑 보너스도 잘 나오고 야근 없이 일찍 끝나고 일도 보람있고 동료들도 재밌고 친절하고 정말정말 좋았다. 그 변태 놈을 만나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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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5. 내 꿈은 온전한 내가 되어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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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막은 이미 스팀잇 첫 글에 썼다. 그 나쁜 놈 덕분에 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되었고, 퇴사 후 오랫동안 교토를 왔다갔다하며 치료를 받았다. 아직도 극복중이다. 좀처럼 쉽지가 않다. 나 자신이 자꾸만 초라하고 한심하고 나약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자신감이 금방 사라진다. 들었던 철은 내려놓은 지 오래이다. 어릴 때 못 부린 어리광을 최근 2년간 다 부리고 있다.

어릴 땐 어른스러웠는데 어른이 될 나이에 아이가 되버렸다.
PTSD가 되면서 많은 걸 까먹었다. 그래서 다시 배우는 중이다.

내 글에 정성스럽게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에게 대댓글을 달지 못하고 다른 걸 하는 것 만으로도 자존감과 자신감을 잃는다. "그 분들의 진심에 어서 답을 해드려. 지금 뭐하는거야." 라고 내면에서 질책을 하는데, 스스로의 질책에 기가 죽는 것이다. 쓰고 보니 웃기다. 스스로의 질책에 기가 죽다니... 헐 ㅋㅋ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고 싶은지 잘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그냥 되는 대로 해보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지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는 게 지금은 더 중요한 것 같아서 그렇게 하고 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온전히 하나가 된 미래의 나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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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6. 내 꿈은 세계와 한국의 방방곡곡을 돌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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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지구인이라고 생각했다. 지구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에서 태어난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 지구를 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같은 이유로 내가 태어난 동네인 한국을 여기저기 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디지털노마드가 되려고 취직이 아닌 프리랜서 생활을 선택했다.

6월에 키키랑 노숙을 하더라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닐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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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내 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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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꿈에 대해, 되고 싶은 모습에 대해 이것저것 적었는데...’ 라고 회상하며,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8년전에 쓴 글들이다. 으아아...

<깜빡이> 매우 오글거리니 주의하시오




그리고 이건 스웨덴에서 돌아와서 쓴 글인데, 내용이... 마치 지금의 내가 썼을 것 같다. 지금은 이런 걸 혼자 거울을 보며 이야기 한다...;;;


흠... 이런 내용은 정말 어릴 때부터 적어왔던 것 같다. 어릴 때 성서/경 책 읽을 때는 같은 내용으로 기도도 여러번 했던 것 같다. 결국엔 좋은 나무 같은 사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떳떳한/옳바른/도덕적인/멍청이가 아닌 어른이 되는 것이 꿈인지도...헉.. 어떡하지.. 나 되게 멍청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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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을 고르는게 쉽지가 않네요.

@trueonot님. 뉴비 서포트 흐름 끊기 ㅎㅎㅎ
@wonsama님. 하생시 열심히 쓰시길래 꿈생시 드립니다 ㅎㅎㅎ
@grapher님. 꿈이 히어로이신가 해서 ㅎㅎㅎ

이미 많이 유명하신 분들은 다른 분들에게 지명 받으실 것 같고,
이렇게 3분,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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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빼먹은 게 있네요.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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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내 꿈은 사랑이 넘치는 가족을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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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서로에게 사랑을 나누기엔 마음의 여유가 너무 없었다. 나는 집을 떠나서 사랑을 받아보고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타인을 사랑하는 데에는 곤란함이 없는데 나와 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마치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 듯 잘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나와 내 가족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많이 고민해 왔고 나는 언젠가 이것을 해결할 것이다. 앞으로 생길 가족에게는 그 어떤 결핍도 느끼지 않도록 따뜻한 사랑을 잔뜩 나눠주고 싶기 때문이다.

가족들을 더 잘 챙기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 받기를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여 나를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사랑으로 가득 찬 내가 가족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 자연스레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겠지. 나는 가족구성원 중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 방법이 제일 빠르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당당하게 공개하는 것이다. 이 위에 사랑을 쌓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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