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다.
자신의 여러가지 모습에 대해 긍정하게 만들어주는 책인데
퍽이나 나와 닮은 작가의 모습과 생각들을 보고 놀랐다.(나만 이상한게 아니었구나..)
나는 내성적인 성격이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편하며 자주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는 혼자 있는 사람을 곱게 보질 않는다.
그런 나에게 결혼은 돌파구가 되어주었다. 핑계거리가 항상 있다.
누군가가 만나자고 하면 남편 밥 해줘야해 아기 돌봐야해 등등
(그래놓고 외식하고 아기 업은 채로 글쓰기를 한다..
내 경우로 보자면 시간 없다는 말은 항상 하기 싫다는 예의있는 말이다.)
그런데 나에게 고민은 내성적인 성격이면 혼자 지내면 혹은 사람들과 교류를 많이 안하면 행복해야 되는데
그건 또 아니라는 거다.
활발함을 가장했던 시기가 있었다.
조용했던 고등학교 시절 말이 없는 나에게 반아이들이 내가 맘에 들지 않는 별명을 지어주고
(꿀먹은 벙어리를 줄여 '꿀'이라고 불렀다-_-)
놀리듯이 부르고 (몇몇 짖궂은 친구들이 그랬다)
그런데 나는 그 상황이 맘에 들지 않지만 마땅히 또 반박할 거리가 없어
(그 친구들 입장에선 장난이었기에... 괴롭히는게 아니었다)그냥 씩 웃고 말았다.
그런 시절이 맘에 들지 않아 대학을 간 후 활발함을 가장했다.
첫날부터 다른 친구들에게 말을 붙였으며 내 마음에 불편함이 느껴져도 여러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말을 붙이고 웃고 했다. 말 그대로 활발함을 연기했다.(나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서도 이런 내용이 똑같이 나온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다음이다.
내성적인 내가 이렇게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 활발함을 연기했다면
나는 마땅히 이 상황이 불편하며 마음속으로는 항상 혼자 있는걸 갈구하며 행복하지 않아야 맞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그 시절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 시절에 나는 행복하지 않았던가?
아니다. 활발함을 가장했던 나는 처음에만 어색함을 느꼈고
곧 몇몇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대학 시절을 나름 즐겁게 보냈다.
(산악 동아리, 볼링 동아리 등등 가입하여 거기에서도 나답지 않게 소외되지 않은
나름 존재감 있는 사람으로 지냈다)
그렇다면 나는 원래는 활발한 사람이었는데 그걸 몰랐던걸까?
그건 또 아니다.
대학을 휴학하고 중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그곳에서 다시 일년정도는 활발함을 연기하고 (반친구들과 매일 맥주와 양꼬치를 먹으며 공부는 뒷전) 그 뒤에 이은 일년은 다시 고등학교 시절의 존재감 없는 나로 돌아갔다....
내가 한가지 모습만 있으면
나는 인생이, 나의 행복 보물 찾기가 조금 더 쉬울 것이다.
내성적인 나만 있다면 사람과 교류하는 것을 줄이고 혼자 있는 시간을 늘리면 행복해질 것이다.
활발한 나만 있다면 사람을 자주 만나 시덥지 않는 농담 따먹기(시덥지 않은 농담따먹기를 하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의 없다고 된통 혼나고 혼자 울기도 했다..)나 장난을 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사람들과 같이 하면 될 것이다.
근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내성적인 나만 있는 것이 아니며,
나는 활발한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농담 따먹기만 한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며,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고 글쓰기만 한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딜레마가 온 것이다.
(30 중반이 되서 이제서야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가 온 것이다..
사추기일지도..)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활발함을 가장했던 시기에 나는 행복했다고
(행복했었어야만 한다고=안그러면 내가 너무 가엾어지니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진정한 나의 모습은 고독을 좋아하고 혼자 사색과 글쓰기와 홀로 산책을 좋아하는 것인데 난 그때 행복하다고 착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오랜 생각 끝에,
활발했던 나도 사람들과 교류를 많이 했던 나도 행복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담 간단할 것이다.
지금부터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교류를 시작하면 난 행복해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또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나는 몇년간의 외국생활에서 한국 사람을 많이 사귀지를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웃고 떠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나는 더욱 더 쓸쓸함을 느꼈다..
그래서 문제가 이리 복잡해진 것이다.
나는 다중인격인가?(ㅠㅠ)
책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이라고...
사람의 인격은 타인을 만나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라고..
사람의 모습은 단 한가지만 있을 수 없으며 어떠한 사람에게 나의 모든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작가는 또한 말한다.
어느 장소나 어떤 사람을 만나 자신이 못난 모습 (자신이 생각하기에 싫은 모습)이 나온다면 그건 나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타인에 의한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을 만나 자신이 만족하는 자신의 모습 (내 경우엔 잘 웃고 자연스레 명랑해지는 친절해지는 나의 모습)이 나온다면 그것 또한
내가 잘나서 그런게 아니라 그 타인의 덕분이라고 말이다.
그럼으로써 백프로 나에 의해서 나의 모습이 나오는 건 불가능하며
나의 어떠한 모습도 타인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어느날 내성적이었다가 어느날 활발해졌다가 하는 소시오패스(?)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나를 내성적으로 만들고 (나를 꿀이라고 불렀던 그 아이...)
어떤 사람은 나를 명랑하게 만든다.
어떤 장소는 나를 침울하게 만들고
(유학시절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 꼈을 때& 서로 친한 남편 친구들 사이에 내가 덩그라니 꼈을 때)
어떤 장소는 나를 명랑하게 만든다.
이 모든게 나의 잘못만은 아니었던 것이다..(정말 다행이다..)
책을 읽고 나를 명랑하게 만들어준 그 타인에 대해 고마움이 생겼다.
내가 침울했던 시절의 나 자신을 탓하지도 않게 되었다.
나는 인연에 따라 어떤 타인을 만났던 것이고 그래서 나는 그런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나의 탓도 또 타인의 탓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인연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던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나의 여러가지 모습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다중인격이 아니다.
다양한 모습의 나로 더욱 다채로운 인생을 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