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큰 이코노미 설계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고민은 아마도 토큰이 사용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사용자들이 토큰을 쓰지 않으면 토큰이 순환되지 않고, 토큰 경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많은 토큰 이코노미 설계자들이 온라인 상점과 같은 토큰 사용처를 함께 도입하곤 한다. 토큰을 쓸 수 있는 곳을 만들면 토큰이 사용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토큰 생태계를 지켜본 경험으로는 사용처를 만드는 것과 토큰이 널리 사용되는 것은 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토큰 사용을 활발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야기를 풀어가기 전에 한 가지 질문에 답을 해보자. 지금 우리는 한국에 살고, 한국 돈인 원화를 사용한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해보자. “인도는 큰 시장이며 미래 잠재력이 있습니다. 원화보다는 인도 루피화를 쓰는 것이 유망합니다. 제가 루피화가 쓰이는 가게도 만들었습니다. 당장 은행에서 원화를 루피화로 바꿔서 사용하세요!”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아마도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원화가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귀찮은 환전과정을 거치고 루피화를 쓸만큼 우리는 한가롭지 않다. 그런데 토큰의 사용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원화 중심의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토큰을 사용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비합리적이다. 아무리 비트코인이나 다른 토큰이 유망하더라도 그건 그쪽 세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도 루피화를 사용하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다. 바로 인도에서 온 사람들이다. 비록 한국에서 살지만 그들간의 거래에서는 간간히 루피화도 건네질 것이다. 인터넷 뱅킹을 통해서일 수도 있고, 실물을 통해서일 수도 있다. 인도와의 연결고리가 많은 사람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 강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토큰 이코노미 설계자들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비트코인을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사람들을 관찰해보자. 그들은 비트코인의 가치와 미래를 믿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스팀은 어떠한가? 스팀을 쓰는 사람들도 스팀이라는 토큰 시스템에 푹 빠진 사람들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토큰이 널리 사용되기 위해서는 토큰 시스템을 믿고 따르는 커뮤니티를 먼저 키워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커뮤니티 형성 만으로는 토큰 사용이 활발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 두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다. 하나는 사용하기 편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토큰을 쓰기 위해 번거로운 작업을 거쳐야 할 수록 토큰은 점점 덜 사용되게 된다. 쓰기 편하고, 빠르고, 가능하면 수수료가 없거나 적어야 토큰이 더 자주 사용될 수 있다.
제일 중요한 핵심인 마지막 한 가지는 조금 의외일 수 있다. 토큰이 널리 사용되기 위해서는 토큰을 쉽게 벌 수 있어야 한다. 일반인이 비트코인을 “벌기” 위해서는 채굴기를 사서 채굴풀 설정을 하고 채굴기의 소음과 열기를 견뎌내고 전기요금을 감당하면서 채굴기를 돌려야 한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토큰 이코노미가 가장 활발하다고 여겨지는 스팀은 글을 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비록 큰 금액은 아닐지라도 토큰을 벌 수 있다. 쉽게 번 돈은 쉽게 쓰이기 마련이다. 토큰 사용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토큰을 어렵지 않게 벌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토큰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토큰 이코노미라는 경제 공동체의 시민이다. 시민들이 경제 시스템을 신뢰하고, 돈을 벌고, 쉽게 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경제가 잘 돌아가기 위한 핵심이며, 경제체제에 적용되는 기초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커뮤니티, 사용성, 획득성, 이 세 가지 요소를 함께 만족한다면 따로 사용처를 만들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시장을 만들어가고 토큰을 사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관된 한 가지 주제를 짚고 넘어가자. 가치고정 토큰(예를 들어 1 USDT는 언제나 1달러 가치를 갖는다)을 만들면 실생활에서 널리 쓰이게 될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현재 가장 가치고정이 잘 된 USDT나 BitCNY 등은 실생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테더 지갑을 가지고 수수료를 내며 USDT를 쓸 바에는 그냥 페이팔이나 신용카드로 달러를 쓰는 것이 훨씬 더 편하기 때문이다. 또한 달러를 쓰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미국이라는 경제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인데, 이들이 달러의 블록체인 버전인 USDT를 나서서 쓸 이유도 없다. 필자도 한 때는 가치고정 토큰의 파급력을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가치고정 자체는 토큰의 사용에 큰 영향을 주지 않으며, 가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위의 세 가지 요소를 만족하는 토큰이 더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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